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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by 맨큐 2007.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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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사람을 사랑해?'

언뜻 생각하면 참 쉬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쉽게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 분명 어떤 이유가 있기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일 테니까요.

아직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논할 만큼 충분히 긴 세월을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이고, 그러한 이치는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구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왜 하필(?)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에 대한 질문에도 논리적으로 막힘없이 답변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헤어질 때에도 그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만 이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 해서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니 사귀다가 헤어질 수는 있는 일이지만, 그 헤어짐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두 사람이 상호 합의할 때라야 비로소 헤어짐이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더랬죠.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사랑하고 있었던 그 사람, 그리고 저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사람이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유와 함께 꺼냈던 이별이란 한 마디로 인해 벌어졌던 상황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평소 꿋꿋하게 첫사랑이 제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며 마지막 사랑이 될 거라 믿어 왔는데, 그러한 신념이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깨어졌다는 사실이 꽤 큰 충격으로 작용한 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제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제게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무덤덤하게 - 무덤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말할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도 싫었더랬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일부러 찾아볼 장르의 책이 아니었지만, 그 때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색다른 경험은 제 취향조차도 충분히 바꾸어 놓고도 남을만한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소설은 그저 당시의 힘든 마음을 추스려 볼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약간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이별로 인한 괴로움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잊혀드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정말 힘들고 괴로워서 죽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문득 배고프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는데 '나 지금 많이 힘든데 이렇게 밥이나 먹고 있어도 되는 걸까?'와 같은 죄책감(?) 같은 거 말이죠.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밥이야 그렇다 쳐도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상황에 한가하게 책을 읽으며 책 내용에 공감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이렇게 간단하게(?) 아픔을 치유받아도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고, 내용에 몰입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괴로움이란 녀석이 절 찾아오긴 했지만 말이죠.

알랭 드 보통은 이 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클로이라는 한 여자와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경쾌한 문장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만남, 사랑, 다툼, 그리고 이별까지... 역자 후기에 있는 것처럼 연애라는 "케케묵은" 문제를 이렇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알랭 드 보통이 이 소설을 집필한 시기가 우리나라 나이로 25살이었을 때라고 하니 이 역시 알랭 드 보통의 통찰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책이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책 제목에 대한 답변을 주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을 하면서 겪었을 법한 에피소드들을 때로는 진지하게, 또 때로는 가볍게 독자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아, 나도 이랬었는데...'라며 공감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준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또 그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어떤 운명에 이끌리듯이 그 사람과 사귀게 되기까지의 과정.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대개는 무의식적인) 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 2단계에 불과하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그러나 우리의 정직한 면 때문에 이런 기만은 결코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서 상상했던 대로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느냐, 그 사람은 사랑이 없을 때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붕괴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발명해 낸 환각에 불과한 것 이니냐 의심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낭만적인 운명론을 믿고 있는 분들에게는 무척이나 도전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의 문제에 있어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많다고 단언합니다. 어쩌면 헤어짐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그 사람은 내 운명이 아니었나 봐'라는 변명을 위한 여지를 만들어 두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절대 그렇지 않아'라며 반대 의사를 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고, 그 사람과 사귀고 싶은 이유는 실로 복잡다단한 과정일 것이고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만 같거든요.


우연에 의한 것이든, 운명에 의한 것이든 어쨌든 서로의 감정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면 사랑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시작된 사랑이 한결같은 수만은 없는 일이죠.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치기 마련이고, 그러한 위기는 정말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우리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 있었다. 클로이의 구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클로이에게는 다른 좋은 점이 많으므로, 내가 이 한 가지 자잘한 일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게임을 망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왜 보통 친구들에게 하듯이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 - 구두만 빼면 -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친구가 내 이상형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헤어릴 수 없이 많아서 거론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니 우정의 경우에는 이상형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 사고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조그마한 실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간혹 사랑의 열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간섭하는 것 쯤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구요.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좀 더 멋져 보이도록, 혹은 자기에게 좋아보이도록 바꾸기 위한 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그러한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을 테지요. 하지만 상대방이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지나친 간섭이라 생각한다면? 그 때부터 문제는 발생하는 것이고,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에 불안정한 요소가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 여자일까? 나는 건너편 소파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는 클로이를 다시 보며 생각한다. 아니면 그녀의 입, 눈, 얼굴 주위에 형성된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 그녀의 표정을 그녀의 성격 전체로 확장함으로써 혹시 나는 잘못된 환유를 한 것이 아닐까? 상징으로서의 환유어, 실체의 속성 한 가지를 실체 자체로 대체해 버린 것은 아닐까? 왕관이 군주를, 바퀴가 자동차를, 백악관이 미국 정부를 가리키듯이, 클로이의 천사 같은 표정이 클로이로......

한 번 시작된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게 됩니다. 한 때는 그렇게 운명이라 믿으며 사랑했던 사람이건만 이제는 '과연 이 사람이 내 운명이 맞을까?'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죠.


하지만 회의감을 품는 순간, 상대방 역시 그러한 태도를 눈치채게 되고, 자신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자신들의 사랑이 진정한 것이었을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로부터 멀어질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가시화되면 전세는 역전되는 거죠.

사랑의 죽음의 피해자는 시신을 되살리려고 하지만 독창적인 전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독창성만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었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두려움에 빠졌고 따라서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노스탤지어에 젖어버렸다. 나는 클로이가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과거에 우리를 붙여놓았던 요소들을 맹목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고 했다. 나는 계속 키스를 했다. 그 이후 몇 주 동안 우리가 즐거운 저녁을 함께 보냈던 영화관이나 식당에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우리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던 농담을 다시 했고, 우리의 몸들이 엉켜서 만들어냈던 자세를 다시 채택했다.

때로 사랑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관계를 회복하고자 시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경험 혹은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결코 좋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노력에 대한 클로이의 한 마디.

"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거 걱정되네. 날 자꾸 너의 에고(ego) 이상형으로 만들면 안 돼."


그녀의 한 마디는 둘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었을까요? 결국 클로이는 주인공에게 이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에 의하면 '낭만적 테러리즘'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지요.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클로이가 그냥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남자든, 여자든 사랑을 하는 관계에 있어 항상 피해자처럼 보이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한 쪽입니다.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렇다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 다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억지스러운 것일 테구요. 알랭 드 보통은 사랑과 이별에 있어서 분명 더 슬픈 쪽이 존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불균형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살아 있을 것이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은 7시. 아직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담요처럼 도시를 덮기 시작했다. 수의처럼. 이 것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일로 너를 탓하고 싶지 않다. 너도 내가 죄책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이다. 네가 캘리포니아에서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산이 무척 아름답겠지. 나도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해 다오. ......유서(지연된 자살로서의 글쓰기)는 많은 초고를 거쳤다. 내 옆에는 구겨진 종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잿빛 외투를 뒤집어쓰고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덜덜 떨고 있는 냉장고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갑자기 나는 알약들이 든 통으로 손을 뻗어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것이 거품이 이는 비타민 C 알약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클로이를 잃은 슬픔을 해결하고, 자신을 떠난 클로이에게 자신의 상실감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물론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요. 사랑을 잃은 분들이라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한 번 쯤은 생각해 보셨을 겁니다. 물론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겠지만요.


자살에 실패한 주인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지에 대해서는 미리 말씀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해결 방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결말만큼은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해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미래완료형 행복을 가정함으로써 잉태된 씨앗이 낭만적 테러리즘으로 인해 재촉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에서 야기된 비극이 바로 이별'이라는 것 정도?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인과관계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느 한 쪽의 포기만으로도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죠. 제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사랑을 포기해야 했기에 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무척 괴로웠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으며 사랑에 실패하곤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고, 이별이란 그저 두 사람의 갈등이 빚어낸 비극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합리화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인상깊게 읽은 구절들 몇 개만 간추려서 보여드렸는데, 책의 전체 내용은 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쾌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끔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철학을 전공한 알랭 드 보통이 25살에 집필한 내용이라니 그 정도쯤은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겠거니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연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사랑과 이별, 그리고 연애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법한 내용들이기도 하구요. 지금 사랑하고 계시거나 이별 때문에 슬퍼하고 계시는 분들, 그리고 옛 사랑을 추억해 보고픈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네요.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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